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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짧지만 우아하게 46억 년을 말하는 법

추수밭(청림출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201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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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B>너무 거대하고 너무 사소한
인간의 모든 역사를
진지한 듯 농담처럼 말하는 법

빌 브라이슨보다 유쾌하고,
움베르토 에코보다 우아하며
닐 게이먼보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46억 년의 모든 것


역사를 둘러싼 모든 질문들에 대한
에스프레소 같이 진하고 독한 대답 </B>

“깊고 무거운 통찰을 농담처럼 위트 있게 전달한다.” 《슈피겔Spiegel》
“어마어마한 책! 역사가 더욱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프리츠Radio Fritz
“쇤부르크는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를 타고 났다.” 《디 차이트Die Zeit》
“우아하고, 재치 있고, 감각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글.” 《프라이타크der Freitag》
“지금까지 독일 출판계에서 볼 수 없었던 작가.”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완벽한 수다’를 통해 즐기듯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SWR2

어떻게 멸종 직전의 인류가 지구 생태계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전 세계가 하나 같이 서구식 문화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여전히 악당, 또라이, 미치광이들에게 끌리는 것일까? 기원전 5세기 제자백가부터 20세기 맨해튼 프로젝트까지 특정 시기마다 천재들이 폭발하듯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기술은 점점 발전하는데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의 아버지들은 보다 나아진 세상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100년 후를 즐겁게 내다봤다. 그러나 우리는 고작 10년 후를 전망할 때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미래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성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그러나 빅뱅을 거쳐 “그리고 인간이 등장했다”는 오만한 선언으로 시작된 인류의 성공담이 정점을 찍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파국의 조짐들이다. 인류는 어느덧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나아가 스스로마저 위협하고 있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 인류가 지나온 길을 재조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B>
너무 무겁지도, 마냥 가볍지도 않은
‘인간의 시대’에 대한 농담 같은 진담 </B>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본 독자들은 그 이름만으로 그의 글에 기대와 신뢰를 보낸다. 쇤부르크는 공기처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법’을 모색했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 이어, 이번에는 역사적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일상을 둘러싼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거대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해고되었던 언론인, 베스트셀러 저자, 미학적 가난을 실천하는 일상의 철학자, 아마추어 역사가라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불리지만 그 모두를 한 마디로 아울러 소개하자면 ‘지식인’ 정도가 될 것이다. 저자는 지식인으로서 시리아 난민과 트럼프 시대의 개막, 게놈 프로젝트와 인공지능 등의 이슈들을 역사에 비추어 바라보며 습관처럼 반복하지만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인류사의 고민들을 이 책에서 하나하나 되짚어보고자 했다.
<B>
그림도, 연표도, 지도도 없이
우아하게 읽는 인간의 역사 </B>

“아내는 호텔을 나가버렸다. 무더위 속에서 아고라를 행진하듯 돌아다녔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딸아이는 한 시간 전부터 와이파이에 접속하느라 끙끙대고 있다. 녀석은 유적 자체보다 세계사적인 유적에 왔다는 사실을 디지털 세상에 증명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중략) 나는 어째서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는 걸까? 지금 눈앞에 펼쳐진 폐허가 독일에서 날아온 우리 가족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나온 발자국을 반추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용 있을까? 아니, 지나온 발자국이 맞기는 한 것일까?”

‘인간은 지금보다 더 현명해질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면서도 저자는 절친한 친구인 유발 하라리부터 가까운 이웃이었던 이사야 벌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석학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 답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쇤부르크는 이러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역사를 야심차게 되짚어보지만, 그렇다고 무거운 화두들을 안고 깊은 사색으로 가라앉지는 않는다. 대신 일상에서 우리가 한 번쯤 품어봤지만 그 무게 때문에 곧 내려놓았던 만만찮은 주제들을 빅히스토리부터 독일문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무거운 듯 가볍게 풀어나간다. 그래서 이 책은 여느 역사책과는 퍽 결이 다르며, 역사책에 국학되지도 않는다. 우선 ‘역사책’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복잡한 연표나 알록달록한 지도, 요란한 삽화들이 단 하나도 없다. 그 대신 오후 티타임에서 오가는 우아하고 유쾌한 대화처럼 오직 텍스트 자체로만 ‘인간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B>
이 작은 한 권으로 읽는
세상의 모든 교양 </B>

“하나의 선명한 결론을 상정하고 역사를 관찰하는 일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내리는 결론은 아름다울 만큼 선명하고 어느 정도씩은 들어맞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양한 사연들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려는, 용기 있지만 절망적인 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역사가로 인정하면서 오히려 역사학자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된 덕분에 곧바로 핵심에 집중할 수 있음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이에 따라 책에서는 먼저 46억 년 전 지구의 탄생에서 시작해 1만 2,000년 전 농업혁명을 거쳐 오늘날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빅히스토리를 훑어본다. 그 다음으로 세계사를 결정지은 ‘대전환’의 순간들에 대해 다루고, 이어서 인류문화의 정수인 도시의 역사를 통해 도시화되는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밖에 언어, 예술, 이념, 발명품 등 역사를 움직인 다양한 힘들을 화두로 삼아 ‘우리는 왜 여전히 대악당들에게 끌리는지’, ‘왜 근대 이후 서양이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는지’ 등의 질문을 끌어낸다.
이러한 구성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부터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등 굵직한 책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교양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도서들의 흐름을 재치 있게 꿰어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구약의 카인과 아벨이 유목문화(아벨)에서 농경문화(카인)로 전환되는 농업혁명에 대한 은유이자 유목민족의 기억으로 남은 최후의 기록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소개한다. 또한 서양정신의 근간을 이룬 인물로 플라톤이 아닌 바울을 꼽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과 구약의 사상을 융합시켜 민족종교를 기독교라는 보편 종교로서 발전시킨 바울에 의해 신이 두려움의 정점에서 인간 개개인을 모두 사랑하는 존재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서구사회에서 개인과 평등이라는 개념이 싹틀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B>
매순간이 특이점인 지금 여기에서
지식인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B>

“자유를 옹호하는 행위는 자신을 가장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여타 이데올로기처럼 우월함을 주장하며 타인을 감화시키려는 순간 더 이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자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바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결국은 교조주의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교조적인 자유주의, 이 둘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결코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추천하는 〈교양인을 위한 필독서 목록〉을 한 권에 눌러 담은 얼치기 ‘노아의 지식 방주’로 끝나지는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 인간의 역사 모두를 담는다는 것은 책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농담일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봤을 일상의 작은 물음에서 시작해, 빅뱅 이래 ‘가장 숭고하면서도 비열한 존재’인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주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과학을 발전시킨 오늘에 도달했으며 어떤 종말을 예견하는지에 대한 거대한 흐름을 훑어보며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직시한다.
다양한 주제들과 분야를 가볍게 넘나들며 저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일관되게 ‘우리는 미래에 더 나아질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자 ‘우리에게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유럽 문명이 주도하는 세계의 네트워크화 과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유럽중심적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동시에 쇤부르크는 유럽이 주도한 근현대사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세계사를 자기애와 이타적 사랑이 다투는 과정으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며 저자는 이 책에서 서구문명이 주도해온 인류의 진보란 인간의 자기애에서 비롯된 결과이자 파국을 암시하는 징후이고, 지금처럼 역사를 자연 대 인간의 투쟁으로 파악하며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도달하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B>
내일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
오늘 건네는 농도 짙은 진담 </B>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악에게 병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충격적인 범죄를 목격하면 자연스럽게 ‘미쳤어!’라고 외친다. 그럼으로써 그 범죄 현장으로부터 스스로를 멀찌감치 떨어뜨린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범죄는 당신과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인간들이 저질렀다. (중략) 히틀러, 이디 아민, 폴 포트, 얀 판 레이덴 같은 이들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보통사람들 모두가 동의한 일에 맞서는 힘겨운 선택을 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존재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가 발전한다는 서구의 믿음은 역사의 종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럽 각 언어권에서 끝을 가리키는 말(라틴어 finis, 프랑스어 fin, 이탈리아어 fine, 영어 finish, 독일어 Ende)에는 목적이란 뜻도 있다. 이러한 서구식의 직선적 역사관이 역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부분이 두 가지 있다. 바로 목표(끝)을 예정하기에 어제보다 내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낙천성과, 끝이 예정된 불완전한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모든 주장에 대해 일단 의심해보는 합리성이다.
극우정당들의 약진과 매순간이 특이점이 되는 때를 앞에 두고 유럽의 지식인이 회의한 끝에 내놓은 결론은 기술이 발전함에도 우리는 게걸음을 가고 있다는 회의 그 자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감히 예쁜 내일을 꿈꾸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은 각자의 의미를 찾아 역사를 만들어나간다는 믿음을 버리지는 말자고. 완벽한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쉽게 냉소하고 쉽게 실망하지 말자고. 세계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며 어제보다 조금만 더 담대해지는 용기를 가지자고. 적어도 더 낫게 실패하자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고.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은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라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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